선댄스의 관객들은 왜 그랬을까?
                                                        글쓴이 maybenet

선댄스로 가는 길은 멀었다. 같은 미국땅이지만, 마운틴 타임이라는 시차가 있을 정도로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곳이다.

여비 좀 아끼려고 비행기를 갈아타다보니 10시간도 넘게 걸렸다.

솔트레이크 시티 공항에 내려 영화제가 열리는 파크시티까지는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가까이 가야했다.

언젠가 한번은 가봐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런 선댄스 행을 결심한 건 당연히 '워낭소리' 때문이었다.

인터넷에 연일 올라오는 감동과 눈물로 얼룩진 리뷰들을 읽다 보니, 어떤 영화인지 직접 보고 싶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댄스 영화제의 명성은 전 세계에 익히 알려져 있지만,

특히 미국에서는 주요 신문 방송들이 매년 빠짐없이 선댄스 필름 페스티벌 관련 뉴스를 전하고 있어 일반 사람들도 누구나 '선댄스'라는 이름에 익숙하다.

한국 다큐멘터리가 선댄스 경쟁부문에 진출했다고 하자 모두들 wow~, really? great! congratulations!! 한마디씩 하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선댄스로 향했다.





공항에서부터 파크시티까지 영화제 곳곳을 장식한 2009년 공식 포스터 로고,

캐치프레이즈 'story time 8509'가 25년 선댄스 영화제의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파크시티는 유타 주의 록키산맥 자락에 있는 스키리조트로 유명한 곳이다.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스키 로프가 끝나는 지점, 지점에 극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에 이름표를 건 영화 미디어 관계자들, 오로지 영화제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

유타 주의 시민들 말고도 각지에서 놀러온 사람들이 스키복 차림 그대로 영화를 즐기기도 한다.

매우 다양한 관객들이 '워낭소리'를 보기위해 객석을 가득 메운 채 앉아 있었다.

나도 기대와 흥분, 설레임으로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숨죽여 지켜봤다.  



프롤로그를 통해 소의 죽음을 미리 알리고 시작하는 영화,

75분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끌어갈지가 자못 궁금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소. 그게 전부다.


놀랍게도 그 지극히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이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인터넷으로 사전 예습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열심히 보느라 눈을 똑바로 뜨고 봐서일까,

아니면 정말 내 가슴은 황폐하게 메말랐단 말인가,

분명 가슴 뭉클한 대목 대목이 있는데, 내 눈에서는 전혀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헛! 그런데 이건 뭐지?

극장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낮게 훌쩍이는 소리는?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제법 많은 관객들이 연신 손으로 눈을 훔치고 있는 게 아닌가?

흠...영화가 계속되는 동안 관객들은 내내 안타까움에 탄성 소리를 내고, 웃고, 울고 있었다.


'내 평생...영감 잘못 만나서...아이고 내 팔자야...' 하는 식의 할머니 넋두리와 잔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지칠 만큼 반복되는데,

 '내가 저 사람 하나 잘못 만나서 평생...' 할머니의 이 말이 나올 때마다 관객들은 한번도 빠짐없이 웃었다.





사진관에서 할아버지한테 웃어, 웃어야지,

몇번 주문을 하다가 끝내 웃지 않는 할아버지를 향해 할머니가 급기야 웃어~라고 버럭(!) 소리치는 대목에서는

모두들 박장대소.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병원에 간 할아버지가 진찰 받는 동안 다른 차들과 나란히 주차(?)돼있는 소달구지의 풍경도 깔깔깔 웃음을 자아냈다.

 parking lot 이 생활공간의 일부인 미국인들에게는 더욱 재미있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새로 들여온 젊은 소가 늙은 소를 구박할 때,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할아버지가 소를 팔러 갈 때,

마침내 소의 코뚜레와 워낭을 풀어줄 때,

소의 주검에 한 삽, 한 삽 흙이 덮힐 때,

그리고 소가 남긴 마지막 선물을 바라봐야 할 때 No... No... 소리와 함께 훌쩍이는 소리도 조금 더 커졌다.






영화가 끝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스크롤이 흐르는 동안에도 내내 자리에 앉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훔쳤다.



나도 의자에 깊숙히 기대 감상에 빠져 있던 참이었는데, 악! 갑자기 옆에 앉아 있던 어떤 미국인 남자 관객이 내 손을 덥썩 잡는 게 아닌가.

말 그대로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을 빼지도 못한 채로 엉거주춤 일어서려는데,


그는 더욱 힘을 줘 내 손을 잡고 흔들기까지 하면서 연신 thank you~thank you~thank you so much를 외치고 있었다.

고맙다,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그 다음 말은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였다.

급당황한 채로 나는 겨우 한다는 말이,

저 스탭아닌데요...I know, I know 알지만 같은 한국 사람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란다.

 아, 네;;; 고맙습니다.    

이후 이어진 감독과의 Q&A 시간에 관객들의 열띤 질문들을 듣다보니 더욱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충분한 공감을 자아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

왜 그렇게 오래 기획을 했는지?

한국에서는 개봉을 했는지?

 한국 관객들의 반응은 어떤지?

(개봉관이 점점 늘고 있다는 대답을 듣고 일제히 박수를 쳤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영화를 봤는지?

보고나서 뭐라고 하셨는지?  

영화 중에 나오는 광우병 시위나 한미 FTA반대 시위 장면은 의도된 연출인지 아닌지?

스탭은 모두 몇명이었는지?

디렉터로서 제작을 하면서 주인공에 대한 밀착 접근과 거리두기를 어떻게 겸비할 수 있었는지?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중간 중간 Thank you, Beautiful movie라는 찬사가 계속됐고 감독에게 꼭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관객도 있었다.

이 날 한국인 관객은 나를 포함해서 단 8명, 교민 한 분은 거의 다 잊고 있었던 고향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준 점이 너무 고맙다고 했고,

또 다른 분은 소의 눈망울과 부모님 모습이 오버랩되어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너무 어렸을 때 입양돼 와서 한국말도 한국문화도 전혀 모른다는 한 여학생은 그런데도 가슴에 무척 와 닿았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는데,

사람들이 계속 very interesting, so beautiful, very touching, inspiring, real cross cultural experience, I love this film ...하며 말을 걸어온다.

 sorry, I am just film lover like you...하는데도... 어쩔수 없이 그래,

아마 나는 대한민국 대표관객?

이런 생각을 하며 thank you, thank you 인사를 하면서 극장을 빠져 나왔다.

대체 이들 외국인들은 과연 어떤 부분에 그렇게나 공감했을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몇 명에게 물어보았다.  

한 미국인은 미국에도 특히 남부에는 농장 지역이 많기 때문에 그런 'rural life'(시골, 전원생활)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간직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런 추억 속으로 자신을 돌려 보내줘서 고맙다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도 개, 고양이를 자식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소와 할아버지의 우정, 연대감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도 했고.

뜻밖에 이들도 할머니의 잔소리와 신세한탄이 어린 시절 자신들의 엄마가 아버지에게 하던 잔소리랑 똑같아 한참 웃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미 잊었거나 쉽게 놓치고 사는 부모의 헌신에 대한 기억으로 가슴이 뭉클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말의 맛깔스러움이나 뉘앙스가 전혀 살지 않는 영어자막을 따라 보면서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소가 빚어낸 일상, 그 삶의 면면이 그대로 다가간 것이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던 '관계', 그 관계속에 녹아있는 정서와 감정이 그들 가슴에도 차곡차곡 쌓였던가보다.  

선댄스에서 최종 수상작은 아니었지만, '워낭소리'는

수 백편도 넘게 제출된 전 세계의 다큐멘터리 중에서 official selection으로 선정된 단 16편 다큐멘터리 중의 하나다.

그 자체로 명예롭고 수상에 버금가는 성과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고백할 게 있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냐하면? 솔직히 한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울었다.  
  
늙은 소와 할아버지가 무거운 나무 짐을 나눠지고 나란히 함께 걷는 장면이 있다.

둘은 똑같이 불편한 다리를 끌며 천천히 한발 한발 어렵게 걸음을 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다거나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도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방향으로 나란히 함께 걷는다는 것,

 그리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진다는 것, 살면서 우리가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우정이, 배려가, 사랑이 바로 거기 있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난다.

1960년 한국을 찾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은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자기도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농부도 지게도 다 달구지에 오르면 될 텐데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저 마음이 내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이 글을 읽을 때 내가 우리 세대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한국인의 심성이 영화 '워낭소리'에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다 사라졌겠거니 생각했는데,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묻혀지고 잊혀졌던 것이었나보다.  







살아가는 일, 힘들다. 세상은 항상 남보다 한발 앞서가라 하고, 무조건 남을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라 하고, 그렇게 어떻게든 살아남으라 한다. 

 '착하게, 아름답게, 사이좋게...'어린 시절 일기장에 또박 또박 눌러쓰던 결심에는 점점 먼지가 쌓여가고

결국 기억창고 어디쯤에 있기나 한 건지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그날, 할아버지와 나란히 걸어가는 소의 목에서 울리는 워낭소리, 그 맑은 소리가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리던 그 소리는 내 마음을 점점 세차게 흔들더니 한 구석의 두터운 먼지를 털어내주고

저 깊은 곳에 처박혀있던 착한 심성들의 한 조각면을 만나게 해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 안에 여전히 숨죽여 살고 있던 순수함과 다시 상봉한 기쁨의 눈물이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의 눈물이고,

이제 다시금 빛나게 가꾸어가겠다는 다짐의 눈물이기도 하다.



광속의 시대에 속도전의 최전선에 내몰리는 일상이지만,

모든 것을 압도하는 위기의 시대에 패닉 상태를 경험하는 마음이지만, 우리에게는 끝내 지켜내고 싶은 삶의 원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인의 마음을 소통시키는 공통의 소망이다.

 '워낭소리'가 선댄스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눈물짓게 한 이유다.

고운 풍경에 맑게 울리던 워낭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 소리가 계속 나를 흔들어 깨운다.

겨우내 때고도 남을 땔감이 할아버지를 위해 남긴 선물이라면, 워낭소리는 이름없는 소가 흙으로 돌아가며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 여리고 착한 자신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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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나온지 10년만에 겨우 찾아 갔습니다.

사는 것이 뭐가 그리 바쁜지 여태 찾지 못하다가 2019년 3월 9일 찾은 워낭소치 촬영지엔,

동상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20190309_161005_HDR.jpg


많은 사람이 다녀 갔겠지만, 지금은 찾는이도 없고, 반겨주는이도 없는 곳.

그러나, 필자에겐 언제나 마음의 고향 처럼 몇번이고 봤던 영화 였습니다.





20190309_144519_HD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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